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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os Laundromat - First Cycle 리뷰 및 해석, 작은 디테일들과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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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담긴 철학, 예술, 기술
Created
2021/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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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블렌더 관련 영상을 많이 봤더니 요즘 Blender Studio 작품이 추천 영상으로 많이 뜨고 있다. 웬만한 것은 다 보는 편인데 그중에서 정말 재밌게 또는 감명깊게 봤던 것은 Spring이랑 Sintel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Cosmos Laundromat(이하 CL)을 보면서 블렌더 최애 작품이 바뀌었다. Sintel과 함께 블렌더 구루가 추천할만 한 작품이었다(스토리도 좋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추천이었다).
그러나 오래전 영상이다보니 작품성에 비해 한국에는 많이 알려진 게 없어 아쉽다. (블렌더 자체도 국내에서 인지도가 낮은 것 같기도 하다.) 원래는 블렌더를 통해 장편 제작하기로 되어있었고 유튜브 댓글이나 *Gooseberry 사이트를 가면 사람들이 Second Cycle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Gooseberry: 블렌더 팀이 이 프로젝트에 붙인 코드네임이 Project Gooseberry였다고 한다.
그런데 작년 Ton Roosendaal이 Goosberry 사이트에 올린 것처럼 스토리나 설정, 캐릭터 등에 대한 팀내 의견 불일치로 스토리팀이 해산되고 CL 시리즈는 개발이 중단됐다. 다만 블렌더에서 *CC-BY 라이센스 하에 CL 시리즈 팀원들이 자체 개발을 할 수 있도록 존중해주었기 때문에 개발될 가능성이 아주 조금 남아있다(하지만 이 글 이후로 어떤 글도 올라오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예 중단된 것 같다).
*CC-BY(저작권자 표시): 저작자와 출처 표기 시 비상업적/상업적 용도의 사용이 허락된다.

Cosmos Laundromat - First Cycle (2015)

한글 자막 (커뮤니티 자막 추가 기능이 중단되서 이렇게 추가했다.)

줄거리

프랭크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쌓인 황량한 섬에 살고 있다. 영상은 양 프랭크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는 양의 몸으로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고 심지어 죽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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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는 밧줄을 묶었던 나무가 떨어지자 바다로 뛰어드려 한다. 이때 빅터라는 세일즈맨이 나타나 프랭크를 설득한다. 프랭크를 '모험가'라고 지칭하며 어느 누구도 그렇게 외로운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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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는 빅터의 말을 무시하는 듯 하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고는 마음이 흔들렸는지 그를 돌아본다. 섬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기대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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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는 마음을 돌린 프랭크에게 재빨리 목줄을 감는다. 고객이 마음을 바꿀까 바로 목줄을 채워버리는 것도,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신뢰감을 주려는 것도 정말 영업사원의 정석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목줄을 채우며 '저희 가게에서 제일 잘나가는 상품'이라고 한다. 빅터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여러 명일 것이라는 암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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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빅터의 손목시계가 울린다. 여러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세일즈맨에게 손목시계는 당연하지만 빅터에게는 환생 파티를 시작하는 알림과도 같다. 손목시계가 울리자 빅터는 때가 됐다는 듯이 프랭크에게 그 자리에 있으라고 말하며 그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손목시계가 때마침 울리는 것을 보아 빅터의 환생은 이미 예정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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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돌아선 빅터의 옷 등짝에 천사의 날개가 자수로 놓여있다. 생명을 환생시키는 '사자'처럼 보이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영업사원의 탈을 쓰고 프랭크를 설득시킨다. 사자보다는 세일즈맨이 더 생명체에게 다가가기 쉽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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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줄에 붙은 장치는 세탁기의 타이머와 같다. rinse, permanent, wash 등의 단어가 적혀 있다. 빅터의 시계가 작동하자 세탁기의 타이머도 돌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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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자 세탁기 안쪽이 비치듯 하늘에 구멍이 생기면서 여러 빛깔로 이루어진 토네이도가 내려온다. 빅터는 기다렸다는 듯 환희에 찬 미소로 토네이도를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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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는 토네이도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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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빅터의 옆에선 양 떼들은 빅터를 무심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프랭크가 자살을 시도하는 그 장면에서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다른 양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프랭크의 일들을 방관하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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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는 결국 토네이도로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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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꽃 무더기 속의 애벌레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자신의 다리들을 쳐다보며 움직여본다.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이다. 애벌레로 다시 태어난 그에게는 아까와 같은 장치가 붙어있다. 섬의 양들은 목에 없었던 걸로 보아 한 번 환생을 시작하면 계속해서 장치를 달고 새로 태어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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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가 있었던 세탁기를 제외하고도 여러 세탁기가 계속해서 돌고 있다. 돌고 있다는 것은 생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여러 대의 세탁기 속에서 각각의 생명들이 계속해서 윤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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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반대편 세탁기에서 나온 빅터는 늘 있는 일인 것 마냥 여유롭게 담배를 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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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다시 한 번 손목시계의 알람이 울리고 빅터는 다른 세탁기로 향한다. 그 세탁기가 환생한 프랭크가 있던 세탁기 방향인 것으로 보아 프랭크는 애벌레의 삶을 비관하고 이번에도 죽음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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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렌더의 스토리보드 영상이다. 빅터가 세탁기를 열자 수십 마리의 나비들이 빠져나온다. 빅터와 같이 환생을 시작한 다른 생명이 여럿이 있고, 빠져나온 나비들이 어떤 일을 벌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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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윤회 사상과 고통의 굴레
CL은 윤회와 환생을 세탁기 안의 코스모스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풀어냈다. 윤회하는 생명체들이 목에 장치를 부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양'은 윤회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윤회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그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하여 환생한다는 내용의 교리이다. 프랭크의 환생 과정을 지켜보던 양들은 도망치는 프랭크를 무덤덤하게 보고 있다. 양떼들은 이미 깨달음에 도달했기에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빅터를 그렇게 무심한 것이 아닐까? 프랭크가 윤회의 굴레에 들어서게 된 것은 다른 양들과 달리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삶을 살고 싶어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첫번째 환생에서 애벌레로 태어난다. 그리고 애벌레에게도 윤회의 목줄이 걸려있다. 윤회를 '목줄'이라고 표현한 것도 윤회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고통스러운 삶이 계속되는 벌과 같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빅터가 시계가 울려 부리나케 달려간 곳은 프랭크가 있던 곳이었다. 프랭크는 애벌레라는 짧은 생에서 역시나 만족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빅터의 시계가 울리지 않았나 싶다.
양들과 세일즈맨 빅터
빅터의 옷 뒤에 있던 날개 자수로 보았을 때 빅터는 생명의 윤회를 관리하는 '사자'의 역할일 듯 싶다. 그런데 그는 '세일즈맨'처럼 고통에 빠진 생명을 설득한다. 세일즈맨으로서 그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생명체에게 계속해서 다른 삶으로 살아볼 기회를 준다.
그러나 빅터는 영업사원이다. 그가 주는 상품인 '윤회'에는 대가가 따른다. 새로 얻은 삶이 그렇게 좋지 않을 수 있으며 윤회를 하는 동안 생명체로서 세탁기 속 세상에 기여해야 한다. 윤회를 상품처럼 디바이스로 표현해 윤회의 '값'에 대해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풀어내는 것이 매우 신선했다. 빅터가 사자가 아닌 '세일즈맨'으로서 등장한 것도 이런 관점과 잘 맞는다.
그런데 왜 하필 양이었을까. 하나님이 신도들을 어린 양이라고 지칭하듯, 천국에 있는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양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보면 프랭크는 천국에서의 삶을 지겨워하며 자신의 무능력함에 한계를 느끼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윤회는 천국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꿈꾸는 진정한 삶에 미련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타이머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뒷이야기

Cosmos Laundromat은 2016년 SIGGRAPH에 출전하여 심사위원상을 받은 작품이다. 제작비는 40만 유로에 조금 못미치는 돈으로 당시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5억 3천 정도 된다. 3D 애니메이션 시장을 잘 모르지만 10분 짜리 영상을 만드는데 5억이면 꽤 크지 않나 싶다. 아무튼 돈을 떠나 엄청 공을 들였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Blender Foundation | gooseberry.blender.org
SIGGRAPH 출품작은 영상 시간이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CL팀은 장편으로 짜여진 스토리를 짧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짧은 시간 내에 강렬한 임팩트를 주어야 했기 때문에 디렉팅을 맡은 Mathieu Auvray의 말에 의하면 예술적인 관점에서 모든 장면을 다르게 창작해야만 했다고 한다.
I knew we had to make the constraints part of the story, that I had to come up with an idea that would make every scene different from an artistic direction point of view. But I also knew that to make such a thing pleasant to watch, we should have a strong story and something that provided continuity along the narrative (such as an actor’s voice, the quality of the animation, performance from the actors, etc.). - Mathieu Auvray
대단한 것은 스토리와 예술성의 균형을 맞추는 와중에 블렌더의 새로운 기술을 접목시켰다는 것이다. 블렌더의 기술을 개발하고 다음 버전을 출시할 때 늘 영상과 함께 올리듯 이번에도 그러했다. 향상된 기술마다 각 영상에서 부각되는 그래픽의 차이가 다른데, CL에서는 빛 반사, hair, smoke 효과와 관련된 그래픽이 돋보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screen-space ambient occlusion과 depth of field 기술이 들어간) 3D 뷰의 향상으로 인한 결과였다.
*screen-space ambient occlusion: 주변의 환경광을 반영해 현실과 같은 빛의 느낌을 재현해내는 것. 그림자의 깊이, 물체 표면에 비치는 반사광 등에 사용할 수 있다.
Blender Foundation | 영상을 보면 안구 표면에 토네이도 빛이 비춰지고, SSAO 기술로 더 진짜 같은 눈을 표현한다. 이 장면 뿐만 아니라 바다에 노을이 비치는 장면에서도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예술적인 디테일만 봐도 수작이지만 스토리와 예술, 그리고 기술까지 모두 조화롭게 소화해냈다. 그렇기에 사람들도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나 싶다. 아쉽게도 개발은 중단되었지만 이보다 더 멋진 영상이 앞으로도 블렌더 스튜디오에서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아마 SIGGRAPH에서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말 나온 김에.. 2021 SIGGRAPH Asia가 12월에 도쿄에서 열린다. 가서 참여해도 되고, 아니면 7월 15일까지 아트 갤러리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할 수도 있다. 아트 갤러리 주제는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사람과 사회 사이의 공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3분 내외의 영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정말이지 꼭 보고 싶다. 너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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