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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고 나는 남아서

발행일
2018/12/11
Tags
에세이
1.
자연사는 그야말로 축복이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날은 애써 잠을 청할 필요가 없다. 치열하게 살아 내었으므로 그냥 지쳐 쓰러져 잘 뿐이다. 살아있는 모두에게 두려운 것은 병사에 선행하는 통증일 것이다.
2.
아툴 가완디라는 똑똑한 미국 의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죽음은 실패나 패배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승리나 축제도 아니지 않나. 최소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3.
"전이(감정 이입)는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왜 환자와 의사 관계에서는 그것을 원치 않지요?" - 영화 <패치 아담스>
4.
나는 지금도 진료실 책상 창가에 목화송이 한 바구니를 두고 있다. 복슬복슬한 흰 솜 송이들을 볼 때마다 아련한 추억들로 마음이 따스해진다. 오랫동안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좋아해본 사람은 안다.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는 걸. 행복이란 떠나는 사람을 잡거나 미운 사람을 혼내주는 게 아니라 좋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다 - 상동아의원 원장 신종찬
5.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설사병에 걸린 사람에게 똥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6.
아이의 울음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던 어느 날, 커피 자판기 옆에 있는 H를 보게 되었다. 그녀의 시선은 고목을 향해 있었다.
화려한 꽃망울이 수놓인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하고 있으니 나무 밑동에 난 썩은 옹이구멍을 보고 있겠지 싶었다.
그러자 궁금증이 일었다. 살아 있지만 썩어 가는 그것을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것은 아닐까.
밝고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그녀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서 그렇게 추측했다.
내 속을 알고 있다는 듯 싱긋 웃더니, 사람의 인생과 나무의 인생이 다를 바가 무엇 있겠냐 한다.
그러더니, 곧 천명과 숙명 그리고 운명의 차이를 아느냐고 대뜸 물었다. 그녀가 말하는 세가지 명은 이러했다.
작은 찻잔 하나를 올려놓은 둥근 쟁반이 있다고 치자. 찻잔은 쟁반 가장자리에 부딪힐 때까지는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 찻잔이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때까지가 운명이다. 그러니 운명이란 그 사람의 의지로 개척할 수 있단다.
그리고 쟁반의 가장자리, 즉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곳이 숙명이고, 이미 만들어진 찻잔과 쟁반은 천명이란다.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이 불공평했을 H가 숙명을 받아들이고 천명을 인정한다는 것. 나는 그것이 스무 살 아가씨에게 얼마나 힘든 사색의 결과였을지,
그때도 지금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녀가 해석하고 만들어간 인생의 흔적들은 지금의 나와 비교해도 너무 고와서 아련한 향기로 내 가슴 한구석에 머물러 있다.
육체가 썩는 것보다 정신이 곪는 채 사는 걸 어찌 살아 있다 할 수 있을까. 항상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그녀가 들려주었던 천명과 숙명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
오늘도 나는 바위가 굴어떨어질지언정 다시 밀고 올라가는 시시포스가 되어, 운명의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 조안 성형외과의원 조안영 원장, [그는 가고 나는 남아서], p.273-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