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건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이다.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천천히 파고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무단 침입한 고양이는 정반대의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냉정한 방식으로. 어쩌면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고양이는 언제나 무단 침입하는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
바위처럼 단단했던 마음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이런 날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 같지만, 사실 그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생긴
아주 작은 균열이 바위를 조금씩 조금씩 조각내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거니 괜찮아, 누가 몰라줘도 상관 없어,
이 일은 재밌어, 어려운 일이지만 많이 배우고 성장할거야'
실제로 많이 배웠고, 뿌듯한 일도 있고, 재밌기도 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쳐 있던 것 같다.
안타까우면서도 억울한, 지치고 슬픈 다양한 감정들이 쓰나미처럼 몰려 오지만
현실의 쓰나미와는 다르게 이런 종류의 재해는 대개 혼자 감내해야 한다.
손보미 작가의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처럼 우리 인생에는 느닷없이 마음 속으로 들어와
소중한 공간을 어지럽히는 것들이 있다. 일이든 사랑이든 우정이든.
나는 보통 내 안에 무언가를 들이는 일이 별로 없기에 이런 종류의 침입이 반갑다.
끝에서는 상처 받은 내가 다시 그것들을 내쫓을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계속 채근하고, 이 모든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뭘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의 정반대.
뭘 해도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슬펐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나 스스로를 좀 먹고 있는 것일까.
안되는 것을 붙잡고 매달리고 있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울고 싶었는데 우는 모습이 나약하다고 생각되어 참았다.
마지막 이야기 '고양이의 보은 - 눈물의 씨앗'을 읽었다. 그는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강인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꾸눈 고양이 '눈이'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대신해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으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눈물 씨앗을 대신 가져가 매일매일 눈물 흘리며 사는 그녀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 되는 대신, 나약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현실로 돌아와 그녀 대신 울었다. '내가 이렇게 울고 있을 때 그녀는 웃고 있을까?'
뒷 내용이 더 있었는데 손발이 오글거려서 더 이상 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