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알라딘
사람들이 원하는 삶
책 첫 장의 주제이다.
사람들은 이미 모두 꿈을 이루었다.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문장이다. 내 꿈이 창업이라면 나도 일론 머스크처럼 회사도 있고 부자여야 되는 게 아닌가. 유행 지난 자기계발서처럼 '꿈을 꾸어라,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흔하디 흔한 얘기라면 실망할 뻔했다.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 책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 꿈을 이루었다의 의미는 모두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꿈이라는 사람이 글은 안쓰고 유튜브만 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글 쓰는 삶이 아닌 유튜브를 보는 삶을 원했던 것이다. CEO가 꿈이라는 사람이 창업은 안하고 직장만 다니고 있다면 도전적인 삶보다는 안락한 삶을 원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표면적인 꿈은 갖고 있지만 사실 지금 살고 있는 모양 새는 자신이 본래 원하는 삶의 모습이다. 반대로 정말 그 꿈을 간절하게 이루려고 노력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이미 그 꿈을 이룬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첫 장을 읽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꿈을 말하기만 했지 이루고 있진 않았구나'라는 생각과 '애초에 내가 원하는 게 창업이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3D 그래픽도 배우고 싶고, 화려한 css를 배우고 싶고, 게임도 만들고 싶고, 친구랑도 놀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피아노도 치고 싶고, ...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매일 지키는 계획 대부분이 창업 자체랑은 거리가 멀다. 창업이 진정 하고 싶었다면 창업 네트워킹 행사에 참여하거나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꿈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사니 인지부조화가 생긴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건 창업이 아니라 '창작'일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것 대다수가 창작이고 개발 자체도 서비스를 만드는 일이다. 더 정확히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고 싶은데 창업에는 경영과 마케팅, 투자 유치 등 창작 외에 다른 많은 일들이 결부되어 있으니 창업과 창작은 결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초발심시도
올해 초, 망나니가 된 내 삶을 돌아보며 내가 개발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계기를 생각했다. 만들고 싶었던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고 올해의 목표도 무엇이든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연 초에는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서 그럴싸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연 초가 지나면 역시 대다수가 그 초심을 잊어버린다. 책에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초발심시도'라고 하는데 잃어버린 초심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초발심시도를 찾아야 한다.
나를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자극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표현한다. 책에서는 씨앗도서, 씨앗문장만이 언급되어 있는데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꼭 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글쓰기 공작소가 나를 초심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나의 씨앗도서는 글쓰기 공작소이고 나를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의 씨앗사람이다. 언제든 나를 초심으로 되돌려 놓는다면 무엇이든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씨앗은 어떻게 찾을까. 책은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씨앗이다. 함께 있을 때 나에게 울림을 주는 사람이 있듯이 책도 나와 공명하듯이 큰 울림을 주는 책들이 있다. 공감가는 부분에 밑줄을 긋는다고 하면 여러 줄, 여러 장을 밑줄로 채우는 책. 전철에 내려서 회사를 가는 와중에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책. 그런 책들이다. 나에게도 그런 책이 여러 권 있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 죽음의 수용소에서, 최근에 읽었던 책은 수학의 쓸모, 이 책이 그러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거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관점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위파사나
씨앗도서는 나를 문득 초심으로 되돌려 놓는다. 때문에 읽기 전까지는 초심으로부터 멀어져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현재 어디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인식하려면 늘 나의 삶 한 순간 한 순간에 주목해야 한다. 책에서는 석가모니의 명상 수행 방법인 '위파사나'에 대해 설명한다. 호흡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자신을 꿰뚫어보는 수행 방법이다. 고통과 번뇌의 주체인 아무것도 아닌 나(무아, 위)를 꿰뚫어보는 것(파사나)이다. 자신의 모든 순간에 집중하고 순간순간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위파사나의 자세이다. 욜로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 너무 많이 쓰여 의미가 퇴색된 '카르페디엠(Carpe diem, 현재를 잡아라)'이라는 말도 사실 오늘만 살라는 말이 아닌 현재를 제대로 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작법
이쯤되면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착각할 수 있겠다.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인 것 같다. 그냥 글쓰기 공작소가 아니라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니까. 책에서 작법뿐 아니라 삶의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자세와 글쓰기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공 되기, 화자 되기
글은 쓰는 자의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는 일은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이며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은 사물과의 사랑을 시도하는 일이다. -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 작가의 글 스승이 산에서 시켰던 글쓰기 수행법이 '사막이 되라, 달팽이가 되라, 깃발이 되라'였다고 한다. 글을 쓰려면 화자가 되고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평생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해오고 말해오고 행동해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 또는 사물이 되어 말하는 게 익숙치 않다.
때문에 글을 잘 쓰려면 대상이 되는 글 재료의 속성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려면 그 사물과 소통하고 사랑을 시도해야 한다. 문제는 우주에 '나뿐'인 사람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사물을 사랑할 수 없으니 깊이 관찰할 수도 없고 깊이 관찰할 수 없으니 대상에 대해 쓸 수도 없다. 글에도 글쓰는 사람의 인격이 그대로 반영된다.
정직함
소설의 경우에는 화자의 설정이 일관되게만 지켜진다면 화자의 정직함을 포장할 수 있다. 그러나 시나 에세이처럼 자신의 느낌과 경험을 글로 풀어낼 때에는 정직하게 써내야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좋은 말, 좋은 경험만 쓰는 것은 인스타그램 피드처럼 현실에 없는 거짓된 세상이고 공상과 같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김수영 <죄와 벌>
김수영 시인은 아내를 대로변에서 우산으로 때리고 나서 시를 썼다. 어린 아들 앞에서 아내를 때린 것도 모자라 만행을 뉘우치기는 커녕 남이 혹시 보았을까 걱정되었고 우산을 버리고 와 아깝다고 썼다. 아내에 대한 폭력, 그리고 포장 없이 드러낸 자신의 못난 생각이 시에 그대로 드러나 읽는 동안 아내에 대한 동정, 시인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애초에 자신의 행동을 묻고 싶었다면 당시의 행동을 시로 기록하지도 않았을 테고 자신의 생각도 그대로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 시인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얼마든지 욕하도록 두었다. '나는 이런 죄를 저질렀으니, 내 시를 보고 벌을 주시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이 <죄와 벌>이 아닐까. 자신의 치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심지어 후손들에게까지 욕을 먹을 수 있도록 시로 남겨두는 일이 김수영 시인 자신이 받을 벌이 아니었을까.
아내를 때려 후회되었다, 이런 조금의 포장도 없이 벌을 받기 위해 가감없이 자신의 만행을 시로 남겨두었다. 아내가 당한 폭력에 공감되어 화가 나기도 했지만 나라면 이 정도의 정직함으로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시를 쓰건, 에세이를 쓰건 글을 써서 독자들 스스로를 깊이 생각하게끔 만들려면 이만큼의 정직함은 있어야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