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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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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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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높은 천장에 세련된 인테리어, 갖가지 명품 브랜드들의 제품이 화려하게 진열된 백화점.
반짝반짝 빛나는 각종 악세서리와 화장품에 눈이 팔려 목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소비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자신을 뽐내고 있는 화장품들과는 달리 나는 동네에 마실 나온 듯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친구와 팔짱을 끼고 산책하듯 천천히 걷고 있는데 ‘난나’라는 화장품 브랜드의 직원이 우리를 잡아세웠다.
“안녕하세요~ 이벤트 중인데 신제품 샘플 체험 해보시겠어요?”
그 말에 우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직원에게 이끌려 샵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화이트 인테리어로 된 깔끔한 이미지를 주는 매장이었다.
직원들은 공간이 주는 이미지와 비슷하게 군더더기 없는 흰색의 정장 차림이었고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른 명품 브랜드들 가운데 당당히 자리하고 있는 그곳은 고급스러운 화장품 패키징과 말끔한 직원들만 보아도 이곳이 명품 브랜드 화장품 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브랜드 이름은 굉장히 생소했는데, 그저 내가 명품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친구와 나는 마사지 침대같은 곳에 편안하게 누워서 신제품 에센스를 잔뜩 먹인 팩을 했다.
차갑고 미끌미끌한 팩의 감촉이 얼굴에 닿았고, 상큼한 민트향이 코로 들어왔다.
피로감 때문인지 편안하게 누워있어서인지 몰라도 팩을 하고 있는 십 몇분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직원은 팩을 거두고 잔량의 에센스를 마사지하듯 손으로 롤링하여 얼굴에 흡수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다른 화장품도 체험시켜주겠다며 손에 화장품을 이것저것 발라주고 제품 설명을 해주었다.
살 생각이 없어서 흘려 듣긴 했지만 좋은 제품을 몸에 바르니 기분은 좋았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빚을 지게 되리라는 것을.
두 세 개의 화장품을 보았을 때, 어느 직원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돈 생각하고 서비스 받으세요.”
평범한 우리가 그들에게 속는다고 생각해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걸까?
직원은 평온한 표정으로 우리의 손에 화장품을 발라주고 있었지만 분명히 속삭였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여기는 명품 브랜드 샵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스트를 멈추고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가서 지금까지 우리가 지불해야할 돈이 있는지 물었다.
아니겠지 했지만 직원은 내게 지금까지 쌓인 영수증을 보여주었다.
친구가 3백만 원, 내가 2백만 원이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잠깐 화장품을 테스트했을 뿐인데 몇백만 원의 돈을 내라니?
완전히 사기꾼들 아닌가.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이벤트’, ‘체험’ 등 무료로 서비스해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겨 놓고, 뒤에서 몰래 돈을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를 속이려고 작정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사장을 호출했는데, 사장은 굉장히 특이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에 하얀색의 여우 꼬리 모피 스카프를 두르고 중성 마녀처럼 화려한 화장을 한 중년 남성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1차적으로 당황했고, 2차적으로는 그의 태도에 당황했다.
“아니, 돈을 지불해야하는 건 줄 알았으면 샘플 테스트 안 받았죠.”
“저희가 언제 무료라고 했죠? 서비스를 받았으면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게 아닌가요?”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입장에서 계속 같은 논지로 말싸움을 했다.
결국 논쟁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영수증만 받아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불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이와 관련된 일을 온라인에 검색해보았고, ‘제보자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매장이 상습적으로 고객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돈을 갈취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아는 지인이 돈을 안 내고 그쪽 데이터베이스에서 내 데이터를 지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편법이긴 했지만 그 방법을 쓰면 대가를 치룰 필요가 없어지긴 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정말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피해가도 되는 걸까?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나는 꿈에서 깼다.
꿈은 그 날 있었던 일을 정리하며 비유를 통해 다른 이야기로 풀어낸다.
내가 이 꿈을 꾸기 전 날 있었던 일은 이랬다.
게임을 안하고 외식과 배달 음식을 안 먹는 챌린지를 하고 있었다. 현재 20일이 넘은 상태다.
지금까지 잘 관리해왔지만 어제는 회사 팀원들에게 퇴사 소식을 전해서 슬프고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였다.
그 날 저녁에 콩국물에 실곤약을 풀어서 먹었는데 마음의 허기는 달래지지 않았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배달 앱을 깔고 떡튀순을 시켰다.
엄청 맛있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먹는 순간 머릿 속에서 도파민이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먹을 때는 행복했지만 순식간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대가를 치뤄야 할 순간이었다.
짜고 맵고 기름 진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건강에도 안좋고 살이 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대가를 치루기 싫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저 그런 기분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뒤 저런 꿈을 꾼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왜 이런 꿈을 꿨지 의문이 들었는데, 어젯밤을 생각해보니 이해가 됐다.
화려하고 비싸고 좋은 화장품은 자극적인 음식에 대한 비유였고, 사장이 돈을 지불하라고 했던 것은 맛있는 걸 먹었으면 응당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내 뇌의 가르침이었다.
‘맛있으면 0칼로리 아니야? 왜 쪄야 하는데!’라는 철 없는 생각에 대한 꾸짖음이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자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에서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한다.’
꿈 속에서는 뭐 이런 매장이 다 있냐며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꿈에서 깨어나 그 의미를 생각해보니 내가 참 욕심 가득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의 대부분은 개꿈이지만, 파헤쳐보면 내 심리, 내 일상을 잘 함축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잘 해석해보면 내 진짜 무의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