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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폭력 - 베르너 바르텐스(Werner Bartens)

published
20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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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title
세상에서 가장 과소평가되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
장르
심리
교양
author
베르너 바르텐스
source: yes24

상냥한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시대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 중 작가의 말
우리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상냥한 폭력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이 말이 '위선'이라는 단어를 정말 우아하게 표현했다고 느낀다. 예전에 만연했던 체벌이나 폭력이 없는 대신 요즘 사람들은 날카로운 말들을 상냥함이나 배려로 포장해 건넨다. 그래서 정이현 작가의 말처럼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어느새 칼날에 베여 있는 자신의 손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처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상처 받은 본인만 안다. 어떻게 보면 감정 폭력은 언론에서 자주 다루는 아동 학대, 성폭력, 살인 등 물리적 폭력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이런 상처를 극복하는 것은 상처 받은 본인의 과업으로 여겨진다. 정신과나 상담센터를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며, 그들은 자신으로부터 잘못을 찾고 자괴감에 빠진다. 그러나 정작 정신과에 가야할 사람들은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군가 감정 폭력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거나 우울해하면 겉으로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람의 '마음이 여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폭력의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이다.
"나는 소심한 사람들이 싫어. 별 것 아닌 거에 상처 받고 그러더라고." "나는 장난이었는데. 너가 자존감이 낮아서 상처 받은 게 아닐까?"
이런 말들은 무례함을 솔직함으로 포장하고 상처 받은 사람을 소심한 사람으로 오도한다. 감정 폭력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가해자의 잘못보다는 애초에 피해자가 나약하거나 소심하기 때문에 상처 받은 것이라는 사회의 보편적인 시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도, 가해자도, 피해자 자신도 감정 폭력에 대해서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책임의 화살이 모두 피해자에게로 간다.

폭력을 대하는 방법

책에는 감정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9가지 방법들이 있다. 그 중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감정 폭력은 그 상처가 보이지 않듯이 폭력 자체도 보이지 않게 일어난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환자의 사례를 들어 감정 폭력의 종류, 가해자들이 상처 주는 방식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냥한 폭력'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감정 폭력은 대놓고 드러나는 폭력도 있지만 가식과 위선에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 폭력의 가해자로 몰리면 자기 변호를 위해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곤 한다. 그만큼 교묘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상대가 아닌 자신을 탓하거나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상처를 주는 방식을 인지하고 있다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책감과 자괴감에 빠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L.C.L 법칙(Love, Change, Leave)이다. 사랑하고, 바꿔보고, 떠나는 것이다. 먼저 나에게 상처 주었던 사람을 이해해보고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나의 상처를 인지시키고 오해를 풀고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살면서 누구나 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슬펐던 기억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고통도 똑같이 헤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의 상처는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관계 개선의 노력이 통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런 사람들을 억지로 만남을 이어나가기보다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방법을 택하라고 한다. 똥이 더러우면 피하라는 말이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책을 읽으면서 위로도 받고 공감도 되었지만 마음 한 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책에서는 감정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런 단어들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스스로는 상처 받은 것들만 기억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
좋아하는 노래 중 스텔라 장의 '빌런'이라는 노래가 있다.
I'm a villain 왜 아닐 거라 생각해. 아주 못돼먹은 작은 악마 같은 나인걸 몰라 You're a villain 왜 아닐 거라 생각해. 미처 몰랐던 악마가 네 안에 숨 쉬고 있어 - 스텔라장, '빌런' 가사
세상은 동화 속 인물처럼 히어로와 빌런 단 둘로 나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과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노래는 이런 사람들의 위선적인 사고를 비판한다.
나는 이 가사에 많이 공감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그를 미워하기도 하지만 상대가 나쁘기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나쁜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도 이해한다. 나 스스로도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피해자의 관점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관점에서도 읽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감정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법을 배우고, 가해자 입장에서는 무심코 뱉은 말이나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상대가 상처 받지 않도록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을 배웠다. 여전히 완벽하진 않겠지만 사람들과의 더 좋은 관계를 위해서 이런 것들을 인지하고 노력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신이 의사이면서도 환자를 '고객'으로 대하는 장사치 같은 의사들을 고발하는 글들을 썼다. 동종업계의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으면서도 할 말을 한 저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저자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면서 사회와 그 구성원 모두가 감정 폭력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 자신조차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때가 있으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감정보다 이성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감정 폭력이 물리적 폭력 못지 않게 위험하다는 걸 깨닫는다면 이 책은 서로를 더 존중하고 괴로운 관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