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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

발행일
2019/01/09
Tags
글쓰기
나를 한 번 속이면 네 잘못이다. 나를 두 번 속이면 내 잘못이다. 나를 세 번 속이면 우리 둘 다 잘못한 것이다.
언제부턴가는 나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창조에 앞서 모방부터 했다. <컴뱃 케이시> 만화책을 공책에 한마디 한마디 베꼈는데, 이따금씩 적당한 곳에는 내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들은 넓고 외풍이 센 농가에서 밤을 지샜다.'고 쓰는 식이었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내가 지어낸 것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대부분을 만화책에서 베꼈다는 사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이면 네 얘기를 써봐라, 스티브. <컴뱃 케이시> 만화책은 허섭쓰레기야. 주인공이 걸핏하면 남의 이빨이나 부러뜨리잖니. 너라면 훨씬 잘 쓸 수 있을 거다. 네 얘기를 만들어봐."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엄청난 '가능성'이 내 앞에 펼쳐진 듯 가슴이 벅찼다. 마치 커다란 건물 안에 들어가서 그 수많은 문들을 마음대로 열어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 문들은 평생토록 열어도 미처 다 열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를 쓸 때는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원고를 고칠 때는 그 이야기와 무관한 것들을 찾아 없애는 것이 제일 중요해."
내가 처음으로 두 건의 기사를 제출하던 그날, 굴드는 그 밖에도 흥미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지만 곧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뜻이었다. 일단 자기가 할 이야기의 내용을 알고 그것을 올바르게 써놓으면 그때부터는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우리 세대를 너무 심하게 비판하긴 싫지만(아니, 사실은 비판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세상을 바꿔놓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우리는 고작 홈쇼핑 네트워크 따위로 만족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알던 학생 작가들 사이에서는 좋은 글이란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므로 감정이 고조될 때 재빨리 낚아채야 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천국으로 가는 거룩한 계단을 놓으려면 그저 망치 하나 들고 멍하니 서 있어서는 안 된다.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굳이 믿는다고 떠들지 않아도 좋다. 대개는 그냥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뿡야! 서로 무관한 두 가지 요소, 즉 사춘기의 잔인성과 염력이 만나면서 하나의 아이디어가 태어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가 그렇듯이 작가도 처음에는 등장 인물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이에 버금가는 깨달음은, 정서적으로 또는 상상력의 측면에서 까다롭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중단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때로는 쓰기 싫어도 계속 써야한다. 그리고 때로는 형편없는 작품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한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설사병에 걸린 사람에게 똥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지금 여러분의 책상을 한구석에 붙여놓고, 글을 쓰력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책상을 방 한복판에 놓지 않은 이유를 상기하도록 하자.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연장통>
내가 하고싶은 말은 글쓰기에서도 자기가 가진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연장들을 골고루 갖춰놓고 그 연장통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팔심을 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자주 쓰는 연장들은 맨 위층에 넣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는 연장은 글쓰기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낱말들이다.
글쓰기에서 정말 심각한 잘못은 낱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으로, 쉬운 낱말을 쓰면 어쩐지 좀 창피해서 굳이 어려운 낱말을 찾는 것이다. 그런 짓은 애완동물에게 야회복을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애완동물도 부끄러워하겠지만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은 더욱더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내 말뜻은 굳이 천박하게 말하라는 게 아니라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쓰라는 것이다. 낱말을 선택할 때의 기본적인 규칙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일 먼저 떠오른 낱말이 생생하고 상황에 적합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낱말을 써야 한다.
그리고 어떤 맡말이 과연 그 자리에 적합한지는 반드시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 조지 칼린(미국 코미디언, 작가)이 말했듯이, 가끔은 남의 '물건'을 걷어차는 것이 통쾌할 때도 있겠지만 쓸데없이 자기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언제나 보기 흉하기 때문이다.
문법도 연장통의 맨 위층에 넣어야 한다. 간결한 문체에 대한 설명서를 쓰면서도 윌리엄 스트렁크는 문법과 관용 표현 중에서 자기가 싫어하는 것들을 따로 설명해놓았다. 예를 들면 그는 '전체 학생'이라는 말을 싫어해서 차라리 '전교생'이라는 말이 더 명확하고 으스스한 어감도 없어 좋다고 주장했다. 그는 '...라는 사실(the fact that)'이나 '이런 방면에서(along these lines)' 같은 말도 싫어했다. 싫어하는 말들은 나에게도 있다. 다는 '그거 정말 쿨하네'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구석에 세워놓아야 하며 그보다 훨씬 더 역겨운 '지금 이 시점에서'나 '하루가 끝날 무렵에' 따위를 쓰는 사람은 저녁도 먹이지 말고 그냥 재워야 한다고 믿는다. 동사에는 능동태와 수동태 두 종류가 있다. '수동태는 한사코 피해야 한다.' 소심한 작가들이 수동태를 좋아하는 까닭은 소심한 사람들이 수동적인 애인을 좋아하는 까닭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자신감이 부족한 작가들은 수동태가 자기 작품에 신뢰감을 더해주고 더 나아가 어떤 위엄까지 지니게 해준다고 믿은 것 같다. 소심한 작가들이 '회의는 7시에 개최될 예정입니다'라고 쓰는 것은 … 말도 안 된다! 어깨를 쫙 펴고 턱을 내밀고 그 회의를 당당히 선포하라! '회의 시간은 7시입니다'
수동태와 마찬가지로 부사도 소심한 작가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창조물인 듯하다. 부사를 많이 쓰는 작가는 대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다. 자신의 논점이나 어떤 심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족이 아니냐는 말이다. 부사를 써주지 않으면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근심과 허위 의식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리고 좋은 글을 쓰려면 연장을 잘 선택해야 한다.
문단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자리에 남아있는 하얀 공간들을 눈여겨보라. 여러분은 그 책을 읽지 않고도 그것이 읽기 쉬운 책인지 어려운 책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문단이란 그 내용에 못지않게 생김새도 중요하다. 문단은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지도이기 때문이다.
문단은 작가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좋은 안내자의 구실도 한다. 가벼운 수필에서는 갈팡질팡하는 것도 별로 흠이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더 진지한 주제를 가지고 좀더 격식을 갖춘 글을 쓸 때에도 두서없이 갈팡질팡하는 것은 몹시 나쁜 버릇이다. 글이란 다듬어진 생각이다.
화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규칙 17. 불필요한 말은 생략하라를 실천하는 것이다. / 발음 그대로 받아쓰기 ('몰르겠구먼', '짜식') / 쉼표 사용법(쉼표를 찍지 않은 것은 화자가 단숨에 내뱉었다는 것을 전달한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만 연달아 쓰다보면 글이 너무 딱딱해져 유연성을 잃게 된다. 언어의 결벽주의자들은 이런 말을 듣기 싫어하고 죽을 때까지 부정하겠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언어도 날마다 넥타이를 매고 정장 구두를 신을 필요는 없다. 소설의 목표는 정확한 문법이 아니라 독자를 따뜻이 맞이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것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 좋은 말쏨시도 역시 유혹의 일부분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토록 많은 남녀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곧장 침대로 직행하겠는가?
건물은 한 번에 한 장씩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다. 여러분도 한 번에 한 문단씩 써나가면 되는 것인데, 이때 사용하는 건축 재료는 여러분의 어휘력, 그리고 기본적인 문체와 문법에 대한 지식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나태해지면 정말 아무도 못 말린다. 그들은 기회만 생기면 빈둥거린다. 신선 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나 할까.
예절을 따지는 곳에서는 식자중에 책을 읽는 것이 무례한 행동이지만, 작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그런 사소한 예절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예절을 따지는 사람들과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아예 아랑곳할 필요도 없다. 정말 진실로 글을 쓰려고 한다면 어차피 여러분의 사교 생활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니까 말이다.
재능은 연습이라는 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자신에게서 어떤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눈이 빠질 정도로 몰두하게 마련이다. 들어주는 (또는 읽어주는, 또는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밖에만 나가면 용감하게 공연을 펼친다. 창조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야구공을 때리거나 400미터 경주를 뛰는 일뿐만 아니라 독서나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정말 독서와 창작을 좋아하고 또한 적성에도 맞는다면, 내가 권장하는 정력적인 독서 및 창작 계획도 (날마다 4~6시간) 별로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방법 : 상황 안에 인물들을 넣어 놓고,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고 받아적을 뿐이다. (상황이 있는 '이야기 상자'에 인물을 집어넣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해보자)
개발도 글쓰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1.
고치기는 나중에, 일단 쓰고 최적화는 나중에 한다.
2.
글이 써지지 않아 눈물이 나올 때.. 울면서 써라. 뭐라도 나오니까.
3.
연장통이 있다. 글쓰기는 어휘, 문장 / 개발은 언어 문법, 라이브러리
4.
글쓰기도 개발도 많이 써봐야 한다. 즉, 경험이 많아야 한다.
5.
글쓰기도 개발도 유혹이다. 잘 쓴 책과 잘 만든 프로그램은 독자와 사용자를 유혹한다.
이런 생각으로 만들었던 블로그 '유혹하는 개발하기'